여름에도 열매는 열린다.

 

열매는 가을에만 맺히는 것이 아니다

오늘 산책길에서 풀들을 오래 바라보았다. 이름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길가의 빈터와 담장 곁에 자란 풀들, 바람이 스치면 가볍게 흔들리는 가느다란 줄기, 끝에 작은 이삭처럼 달린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동안에는 그저 잡초라고 불렀을 식물들이다. 그러나 가까이 들여다보니 저마다 꽃을 피운 뒤 작은 열매를 맺고 있었다.

우리는 열매라고 하면 대개 가을을 먼저 떠올린다. 붉게 익은 감, 노랗게 고개 숙인 벼, 가지에 매달린 사과와 배, 들판의 곡식이 생각난다. 가을은 수확의 계절이고, 그래서 열매의 계절이라는 말이 자연스럽다. 그러나 식물은 가을에만 열매를 맺지 않는다. 봄의 풀도 꽃을 피우고, 여름의 풀도 제 방식으로 씨앗을 준비하며, 겨울을 앞둔 식물도 다음 생을 위한 작은 가능성을 남긴다.

강아지풀도 그러하다. 햇빛을 받아 은빛으로 반짝이는 이삭은 한때 그저 아이들의 장난감처럼 보였다. 어린 시절에는 강아지풀을 꺾어 서로의 손등을 간질이고, 길게 늘어진 털을 바라보며 웃었다. 그러나 그 부드러운 이삭에는 다음 계절을 위한 수많은 씨앗이 들어 있다. 풀은 제 키가 낮다고 해서 열매 맺는 일을 포기하지 않는다. 화려한 꽃을 크게 드러내지 않아도, 자신에게 주어진 자리에서 조용히 생명을 이어 갈 준비를 한다.



볏과식물의 열매는 대개 우리가 곡식으로 떠올리는 작은 낟알, 곧 영과(穎果, caryopsis)라는 형태이다. 벼와 보리, 옥수수처럼 인간의 식탁을 이루는 곡식도 같은 볏과에 속한다. 길가의 이름 모를 풀과 넓은 논의 벼는 겉모습과 쓰임이 달라 보이지만, 저마다 작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 다음 생명을 준비한다는 점에서는 같은 질서를 따른다.

사람은 눈에 띄는 열매만 열매라고 생각하기 쉽다. 크고 달고 붉은 것, 많은 이가 알아보고 손에 쥐고 싶어 하는 것을 성공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자기 삶에 감나무 같은 결실이 보이지 않으면 쉽게 낙심한다. 남들은 좋은 열매를 맺는 것 같은데, 자신은 아직 꽃도 피우지 못한 듯 느껴진다. 세상은 늘 가을의 풍성한 과수원만 보여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삶의 열매에는 여러 모양이 있다. 어떤 사람은 오랜 시간 묵묵히 일하여 가족을 지켜 내는 것으로 열매를 맺는다. 어떤 사람은 아픈 시간을 지나며 다른 이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 어떤 사람은 늦게 시작한 공부를 꾸준히 이어 가고, 어떤 사람은 더 이상 상처를 되풀이하지 않기로 결심하며 자기 안의 열매를 키운다. 세상이 알아주지 않는 작은 성실, 오늘도 포기하지 않고 살아낸 하루, 누군가에게 건넨 따뜻한 말 한마디도 삶의 열매가 될 수 있다.

식물은 옆의 식물과 열매의 크기를 비교하지 않는다. 강아지풀이 벼를 부러워하지 않고, 들꽃이 사과나무를 흉내 내지 않는다. 제게 주어진 뿌리와 햇빛, 계절과 자리에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준비한다. 어떤 식물은 봄에 서둘러 씨앗을 남기고, 어떤 나무는 긴 여름을 지나서야 열매를 익힌다. 모두가 같은 달력으로 살아가지 않는 것이다.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누군가는 젊은 날에 성취를 얻고, 누군가는 한참 돌아간 뒤에야 자기 길을 발견한다. 어떤 사람은 많은 사람 앞에서 빛나고, 어떤 사람은 눈에 띄지 않는 자리에서 오래도록 누군가를 살린다. 남의 계절을 기준으로 자신의 삶을 재단하면, 아직 오지 않은 때를 실패로 오해하게 된다. 그러나 내 안에도 반드시 내가 맺어야 할 열매의 시간이 있다.

열매는 어느 날 갑자기 달리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뿌리가 물을 끌어올리고, 줄기가 바람을 견디며, 잎이 햇빛을 받아들인 시간이 먼저 있어야 한다. 사람의 성숙도 그렇다. 겉으로 아무 변화가 없는 듯 보이던 시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수고, 혼자 견뎌야 했던 기다림이 결국 어떤 열매의 바탕이 된다. 그러므로 아직 눈에 보이는 것이 없다고 해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오늘 길가에서 만난 풀들은 작고 낮았다. 사람들의 발걸음 가까이에 있었고, 누구도 그 이름을 묻지 않았다. 그러나 그 풀들은 이미 자신의 계절을 알고 있었다. 바람이 불면 흔들리고, 비가 오면 젖으며, 뜨거운 여름을 견디면서도 조용히 이삭을 세우고 작은 열매를 맺고 있었다.

열매는 가을에만 맺히는 것이 아니다. 삶도 마찬가지이다. 오늘의 작은 성실이, 이름 없는 기다림이, 누군가를 향한 조용한 사랑이 이미 열매를 준비하고 있을지 모른다. 지금 내 삶이 어느 계절에 있는지 조급하게 묻기보다, 내게 주어진 자리에서 뿌리를 내리고 햇빛을 받는 일이 먼저이다. 식물들이 저마다 다른 모양으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듯, 사람도 자신의 때에 자기만의 결실을 맺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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