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벨이 기록인 게시물 표시

일기 쓰기

이미지
일기는 사라지는 하루를 붙잡는 작은 그릇이다 하루는 생각보다 빨리 사라진다. 아침에 눈을 뜨고, 해야 할 일을 하고, 누군가와 말을 나누고, 밥을 먹고, 다시 밤이 오면 하루는 이미 지나가 버린 뒤이다. 분명 많은 일이 있었는데도 며칠만 지나면 무엇을 했는지 정확히 떠오르지 않는다. 그날의 날씨도, 스쳐 지나간 말도, 마음을 잠시 흔들었던 감정도 시간 속으로 가라앉는다. 일기는 그렇게 사라지는 하루를 붙잡아 두기 위해 쓰는 작은 그릇이다. 일기를 쓰기 위해 특별한 사건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별일 없던 날의 기록이 더 오래 남는다. 아침에 마신 커피가 유난히 쓰게 느껴졌다는 말, 길가의 나무에 새 잎이 돋았다는 발견, 누군가의 짧은 말에 마음이 상했다는 고백, 저녁 무렵 창문으로 들어온 빛이 아름다웠다는 문장만으로도 충분하다. 삶은 대단한 사건보다 반복되는 날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일기는 그 반복 속에서 쉽게 사라질 작은 순간들을 건져 올린다. 일기장 앞에 앉으면 사람은 조금 정직해진다. 다른 사람에게 보여 줄 글이 아니라는 사실이 마음을 느슨하게 만든다. 잘 지내는 척할 필요도 없고, 모든 일을 이해한 사람처럼 말할 필요도 없다. 기뻤다면 기뻤다고 적고, 서운했다면 서운했다고 적으며, 이유 없이 마음이 무거웠다면 그 무거움을 그대로 남길 수 있다. 일기장은 판단하지 않는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서로 다른 말을 해도, 일기장은 그 모순까지 조용히 받아 준다. 그래서 일기는 마음의 방을 정리하는 일과 닮아 있다. 방 안에 물건이 너무 많이 쌓이면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게 된다. 마음도 그렇다. 말하지 못한 생각, 끝내 표현하지 못한 서운함, 설명할 수 없는 불안이 오래 쌓이면 마음은 어수선해진다. 일기를 쓰는 일은 그 마음속 물건들을 하나씩 꺼내 이름을 붙이는 일이다. “오늘은 외로웠다.” “나는 이 말에 상처를 받았다.” “그래도 이 순간은 감사했다.” 그렇게 적고 나면 문제는 그대로여도 마음속의 자리는 조금 정돈된다. 어린 시절에...

모나미 볼펜

이미지
모나미 볼펜, 손끝에 남은 시간 책상 서랍을 열면 가끔 모나미 볼펜 한 자루가 나온다. 투명한 몸통에 검은 심이 들어 있고, 끝에는 푸른색이나 검은색 뚜껑이 달린 가장 익숙한 모습의 볼펜이다. 너무 흔해서 특별할 것이 없어 보이지만, 손에 쥐는 순간 이상하게 오래된 시간이 함께 따라 나온다. 그 볼펜은 단지 글씨를 쓰는 도구가 아니라, 한 시절의 손끝과 마음을 기억하는 물건이다. 어릴 때 필통 속에는 늘 모나미 볼펜이 있었다. 새 학기가 시작되면 연필과 지우개, 자와 함께 몇 자루를 챙겼다. 볼펜 하나를 잃어버리는 일은 흔했고, 친구가 “볼펜 좀 빌려줘”라고 하면 자연스럽게 필통을 내밀었다. 그러다 보면 내 것이던 볼펜은 누군가의 책상 위에 남고, 어느 날은 친구의 이름이 적힌 볼펜이 내 손에 들어오기도 했다. 누가 샀는지보다 지금 누구 손에 들려 있는지가 더 중요했던 물건이었다. 모나미 볼펜으로 깜지를 쓰던 기억도 선명하다. 같은 문장을 공책 가득 반복해서 적던 시간이다. 받아쓰기나 시험에서 틀린 단어, 외워야 할 영어 단어, 한자, 교과서의 문장을 몇 줄이고 따라 썼다. 손가락은 저리고, 손목은 뻐근했으며, 종이 위에는 검은 글씨가 차곡차곡 쌓였다. 당시에는 왜 이렇게 같은 말을 반복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 반복 속에서 글자는 눈으로 읽는 대상이 아니라 손으로 익히는 것이 되었다. 한 글자씩 눌러 쓰는 동안 마음도 조금씩 그 문장 안으로 들어갔다. 볼펜 끝이 종이를 지날 때 나는 사각거림도 기억난다. 잉크가 매끄럽게 나오지 않아 한 번 더 눌러 쓰던 순간, 손가락에 오래 배던 잉크 냄새, 공책 맨 뒤쪽에 몰래 적어 둔 낙서와 친구의 이름이 함께 떠오른다. 지금은 휴대전화 화면을 몇 번 두드리면 긴 문장도 쉽게 지울 수 있다. 틀린 글자는 흔적 없이 사라지고, 쓴 글은 구름 어딘가에 저장된다. 편리한 시대이다. 그러나 종이에 남은 볼펜 자국은 지워지지 않기에 더 오래 기억에 남는다. 한때는 편지도 모나미 볼펜으로 썼다. 특별한 편지지가 없어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