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롱나무꽃 피다
배롱나무 피는 계절 한낮의 열기가 골목 바닥에서 아직 빠져나가지 않은 저녁, 담장 너머로 배롱나무 가지가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낮에는 지나치며 보지 못했던 꽃들이 어둑한 빛 속에서 더 또렷하였다. 살구빛과 연분홍의 작은 꽃송이들은 잎 사이에 무리를 이루고, 바람이 닿을 때마다 한꺼번에 숨을 들이쉬는 듯 가볍게 떨었다. 담벼락에는 낮의 햇빛이 남긴 희미한 열기가 손바닥처럼 붙어 있었고, 멀리서는 에어컨 실외기의 낮은 울음이 끊겼다 이어졌다. 낮 동안 뜨거워진 아스팔트에서는 비에 젖었다가 마른 흙 냄새가 천천히 올라왔고, 화분을 끌어 들이는 소리와 오토바이가 골목을 빠져나가는 소리가 번갈아 들렸다. 배롱나무를 보면 먼저 매끈한 줄기가 눈에 든다. 오래된 나무의 껍질은 벗겨지고 겹쳐지며, 비가 지나간 뒤의 벽처럼 연한 갈색과 회색을 드러낸다. 손끝으로 만지면 차갑고 단단할 것 같은데, 그 위에는 여름 내내 꺼지지 않는 작은 불빛 같은 꽃이 얹힌다. 마치 매끈해지기까지 여러 번의 계절을 견뎌 낸 몸이 꽃의 무게쯤은 가볍게 떠받치는 것 같았다. 화려함은 단번에 피어오른 한 송이보다, 지친 계절의 한복판에서 오래도록 새 꽃을 내는 그 끈기에 가까워 보인다. 그 나무 아래를 지나는 사람들은 대개 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장을 본 비닐봉지가 무릎 곁에서 바스락거리고, 퇴근한 이의 셔츠 등판에는 땀이 마르며, 아이는 앞서 달려가다 잠깐 고개를 든다. 각자의 하루가 너무 가까이 붙어 있어 꽃을 바라볼 여유는 짧다. 그래도 누군가는 휴대전화 화면을 잠시 내리고, 누군가는 아파트 출입문 앞에서 신발의 모래를 털며 가지 끝을 본다. 그 짧은 눈길로도 나무는 충분한 듯, 꽃을 더 내보인다. 몇 해 전에는 이 꽃이 피기 시작하면 여름이 너무 길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기다리던 일이 좀처럼 결론 나지 않고, 마음이 먼저 마르는 날들이 이어질 때였다. 창문을 열면 밤공기보다 먼저 꽃의 희미한 냄새가 들어오곤 했다. 그러나 나무는 매일 같은 자리에 서서 어제보다 조금 다른 꽃을 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