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나미 볼펜


모나미 볼펜, 손끝에 남은 시간

책상 서랍을 열면 가끔 모나미 볼펜 한 자루가 나온다. 투명한 몸통에 검은 심이 들어 있고, 끝에는 푸른색이나 검은색 뚜껑이 달린 가장 익숙한 모습의 볼펜이다. 너무 흔해서 특별할 것이 없어 보이지만, 손에 쥐는 순간 이상하게 오래된 시간이 함께 따라 나온다. 그 볼펜은 단지 글씨를 쓰는 도구가 아니라, 한 시절의 손끝과 마음을 기억하는 물건이다.




어릴 때 필통 속에는 늘 모나미 볼펜이 있었다. 새 학기가 시작되면 연필과 지우개, 자와 함께 몇 자루를 챙겼다. 볼펜 하나를 잃어버리는 일은 흔했고, 친구가 “볼펜 좀 빌려줘”라고 하면 자연스럽게 필통을 내밀었다. 그러다 보면 내 것이던 볼펜은 누군가의 책상 위에 남고, 어느 날은 친구의 이름이 적힌 볼펜이 내 손에 들어오기도 했다. 누가 샀는지보다 지금 누구 손에 들려 있는지가 더 중요했던 물건이었다.

모나미 볼펜으로 깜지를 쓰던 기억도 선명하다. 같은 문장을 공책 가득 반복해서 적던 시간이다. 받아쓰기나 시험에서 틀린 단어, 외워야 할 영어 단어, 한자, 교과서의 문장을 몇 줄이고 따라 썼다. 손가락은 저리고, 손목은 뻐근했으며, 종이 위에는 검은 글씨가 차곡차곡 쌓였다. 당시에는 왜 이렇게 같은 말을 반복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 반복 속에서 글자는 눈으로 읽는 대상이 아니라 손으로 익히는 것이 되었다. 한 글자씩 눌러 쓰는 동안 마음도 조금씩 그 문장 안으로 들어갔다.

볼펜 끝이 종이를 지날 때 나는 사각거림도 기억난다. 잉크가 매끄럽게 나오지 않아 한 번 더 눌러 쓰던 순간, 손가락에 오래 배던 잉크 냄새, 공책 맨 뒤쪽에 몰래 적어 둔 낙서와 친구의 이름이 함께 떠오른다. 지금은 휴대전화 화면을 몇 번 두드리면 긴 문장도 쉽게 지울 수 있다. 틀린 글자는 흔적 없이 사라지고, 쓴 글은 구름 어딘가에 저장된다. 편리한 시대이다. 그러나 종이에 남은 볼펜 자국은 지워지지 않기에 더 오래 기억에 남는다.

한때는 편지도 모나미 볼펜으로 썼다. 특별한 편지지가 없어도 공책 한 장을 조심스레 찢어 쓰곤 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아도 첫 문장을 쓰기까지는 오래 걸렸다. “잘 지내니”라는 평범한 인사 뒤에 마음을 숨기기도 했고, 말로는 도저히 하지 못할 이야기를 작은 글씨로 적기도 했다. 실수하면 수정액을 바르거나, 아예 처음부터 다시 썼다. 편지는 보내기 전부터 이미 여러 번의 망설임을 지나야 하는 글이었다.

편지를 쓰는 동안 볼펜은 마음의 속도를 늦추어 주었다. 생각은 앞서가지만 손은 한 줄씩만 나아갈 수 있었다. 그래서 어떤 말은 쓰기 전에 다시 생각하게 되었고, 어떤 고백은 끝내 종이 위에 남지 못했다. 지금도 오래된 편지 한 장을 펼쳐 보면, 내용보다 먼저 글씨체가 눈에 들어온다. 급하게 쓴 날의 기울어진 글자, 마음을 다잡으며 꾹꾹 눌러 쓴 문장, 잉크가 살짝 번진 자리에서 당시의 감정이 되살아난다. 글씨는 생각보다 정직한 마음의 자국이다.

모나미 153은 오랫동안 값싸고 흔한 볼펜의 이름이었다. 그래서 더욱 많은 사람의 삶에 들어갈 수 있었다. 학생의 공책에도 있었고, 은행과 관공서의 창구에도 있었으며, 식당 계산대와 사무실 서랍, 가정의 전화기 옆에도 있었다. 특별히 아껴 두는 물건은 아니었지만, 막상 없으면 불편한 물건이었다. 필요한 순간마다 조용히 손에 잡히는 존재였다.

그 익숙한 볼펜이 이제는 색과 재질을 달리한 한정판과 프리미엄 펜으로도 새롭게 태어난다. 서울의 올해 색을 입은 ‘모닝옐로우’ 153 시그니처 역시 그러한 변화의 한 장면이다. 그러나 아무리 세련된 옷을 입어도 모나미 볼펜의 본질은 달라지지 않는 듯하다. 그것은 결국 사람이 자신의 생각을 적고, 기억을 붙잡고, 누군가에게 마음을 건네기 위해 손에 쥐는 물건이다.

볼펜 하나가 인생을 바꾸지는 않는다. 하지만 어떤 인생은 볼펜으로 적힌 수많은 문장으로 이루어진다. 깜지로 채운 공책, 시험지의 답안, 보내지 못한 편지, 일기장의 고백, 서류 끝의 서명까지. 한 자루의 모나미 볼펜은 그 모든 시간 곁에 있었을 것이다. 손끝에서 시작된 작은 잉크의 선이 결국 한 사람의 기억을 이어 주는 긴 문장이 되는 것이다.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지하철

일상의 사물학

골목에 대한 단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