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지어, 절대 굴착금지


땅 아래를 흐르는 빛

회색 금속 표면 위에 노란 표지판 하나가 붙어 있다. 표지판에는 굵고 붉은 글씨로 “굴착 절대금지”라고 적혀 있다. 그 아래에는 특고압 전력케이블이 묻혀 있다는 말과, 문제가 생겼을 때 연락할 번호가 적혀 있다. 누군가에게는 도시의 한쪽에 붙어 있는 평범한 안전 안내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 문장을 오래 바라보면, 우리가 밟고 서 있는 땅 아래에 전혀 다른 도시가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된다.

도시는 위로만 자라는 것이 아니다. 높은 아파트와 유리창, 도로와 간판, 자동차와 사람들만이 도시를 이루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보지 못하는 땅 아래에도 수많은 길이 있다. 전기가 흐르는 케이블이 있고, 물이 흐르는 관이 있으며, 가스와 통신의 선들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이어진다. 우리가 현관의 스위치를 누를 때 방이 밝아지고, 여름밤 선풍기가 돌아가며, 냉장고가 쉬지 않고 낮은 소리를 내는 일도 모두 그 보이지 않는 길 위에서 가능해진다.




사람은 눈앞에 드러난 것에 익숙하다. 햇빛은 창문으로 들어오고, 전기는 콘센트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빛은 늘 어딘가에서부터 와야 한다. 멀리서 만들어진 에너지가 수많은 설비와 선로를 지나 우리의 집과 가게, 병원과 학교, 골목의 가로등까지 도착해야 한다. 한순간의 밝음 뒤에는 긴 거리와 보이지 않는 수고가 놓여 있다.

노란 표지판은 그 사실을 무뚝뚝하게 알려 준다. 이곳을 함부로 파지 말라는 말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위험이 있다는 말이며, 동시에 보이지 않는 곳에 누군가의 삶을 밝히는 힘이 흐르고 있다는 말이다. 땅 위만 보고 삽을 내리꽂는 사람에게, 표지판은 잠시 멈추라고 말한다.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아무것도 없는 것은 아니라고, 우리가 알지 못하는 깊이에 이미 많은 것이 지나가고 있다고 말한다.

사진 속 금속 표면은 오랜 시간의 흔적으로 가득하다. 붙었다가 떼어진 전단지의 자국, 긁힌 흠집, 지워진 글자, 비와 먼지가 남긴 얼룩이 겹겹이 쌓여 있다. 도시의 시설물은 대개 사람들의 관심 밖에 있다. 필요한 순간에는 너무 당연하게 사용하고, 문제가 생겼을 때에야 존재를 떠올린다. 그러나 그 표면에는 도시를 지나간 시간이 묻어 있다. 누군가가 광고를 붙였고, 누군가가 떼어 냈으며, 누군가는 그 곁을 지나며 잠시 기대었을지도 모른다.

인간의 마음도 이와 닮아 있다. 사람의 말과 표정만 보아서는 그 안을 다 알 수 없다. 조용한 사람의 침묵 아래에는 오래된 상처가 묻혀 있을 수 있고, 무심해 보이는 얼굴 아래에는 견뎌 온 시간과 말하지 못한 걱정이 지나가고 있을 수 있다.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관계의 땅 아래에도 쉽게 파헤쳐서는 안 될 감정의 선들이 얽혀 있다. 그래서 사람을 대할 때는 눈에 보이는 모습만으로 판단하지 않는 조심스러움이 필요하다.

“굴착 절대금지”라는 문장은 어쩌면 삶을 위한 경고이기도 하다. 타인의 마음을 함부로 캐묻지 말라는 말이며, 지나간 상처를 가벼운 호기심으로 들추지 말라는 말이다. 어떤 것은 땅 아래에 묻혀 있어야 제 기능을 다한다. 드러나지 않기에 소중한 것도 있고, 말하지 않기에 지켜지는 마음도 있다.

도시의 밤이 밝아질 때, 우리는 이 표지판을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 불이 켜지는 순간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다시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러나 어느 골목의 노란 경고문은 그 밝음이 결코 저절로 오는 것이 아님을 말해 준다. 땅 아래에는 오늘도 보이지 않는 빛의 길이 흐르고 있다. 그 길을 지키는 수많은 손길과 설비, 그리고 조용한 경고문이 있기에 우리는 아무 의심 없이 하루를 밝히며 살아가는 것이다.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일상의 사물학

골목에 대한 단상

일상의 사물학|주제별 연재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