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속 가을, 폭염 속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가을 바람
| 부용 |
입추를 앞둔 하늘
오늘 아침 창문을 열자, 먼저 들어온 것은 뜨거운 공기가 아니라 유난히 멀리까지 열려 있는 하늘의 빛이었다. 여전히 8월의 볕은 이마를 눌렀고, 건물 벽에서는 밤새 식지 못한 열기가 천천히 올라왔다. 그런데도 하늘은 며칠 전과 달랐다. 눅눅한 습기가 공기의 윤곽을 흐리게 하던 때와 달리, 푸른 빛은 높은 곳에서 맑게 펼쳐져 있었다.
지난주까지만 해도 여름은 몸 가까이에 달라붙어 있었다. 현관문을 나서는 순간 셔츠가 등에 붙고, 짧은 걸음에도 숨이 무거워졌다. 창문을 열어 두어도 바람은 방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축축한 공기만 커튼을 조금씩 밀어 놓았다. 매미 소리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쉼 없이 들렸고, 저녁이 되어도 골목의 아스팔트는 낮의 열을 오래 품고 있었다. 더위는 단지 온도가 아니라 하루의 표정까지 무디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날들에는 차가운 물 한 잔을 마시고도 갈증이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사람들은 서로의 안부보다 먼저 덥다는 말을 나누었고, 그 말 속에는 몸의 피로와 한철을 버티는 수고가 함께 묻어 있었다.
그런데 이틀 전부터, 더위가 사라진 것은 아니어도 공기 한쪽에 빈틈이 생긴 듯하다. 햇볕은 여전히 강하지만, 시선을 들어 보면 하늘이 전보다 높다. 구름은 급히 몰려다니지 않고 제자리에서 흰 가장자리를 드러내며 떠 있고, 가로수 잎은 습기에 눅눅하게 처졌던 때와 달리 빛을 또렷하게 받아낸다. 땀을 닦으며 걷다가도 문득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는 순간이 생긴다. 더운 날이 계속되는데도 마음 한편이 먼저 가벼워지는 까닭은, 아마 계절이 움직이고 있다는 작은 징후를 알아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내일은 입추이다. 절기는 달력 위의 한 줄에 지나지 않는 듯하지만, 때로 그 한 줄은 보이지 않는 방향을 알려 준다. 입추가 온다고 한낮의 열기가 곧바로 물러나는 것은 아니다. 매미는 여전히 울고, 선풍기는 밤늦게까지 돌아갈 것이다. 그러나 여름의 깊은 곳에는 이미 다른 계절의 기척이 스며들기 시작한다. 아직 뜨거운 가운데서도 바람의 결이 달라지고, 해가 기우는 시간이 조금씩 빨라지며, 하늘은 제 빛을 맑게 정돈한다.
계절은 늘 그렇게 큰 소리 없이 변한다. 어느 날 갑자기 여름이 끝나고 가을이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오래된 더위 속에 서늘한 틈 하나가 먼저 생긴다. 삶도 그러한지 모른다. 마음이 완전히 달라졌다고 말할 수 없는 날에도, 예전에는 견디기만 했던 일을 조금 더 차분히 바라보게 되는 때가 있다. 끝나지 않은 걱정이 남아 있어도 그 걱정만이 하루의 전부는 아니라는 것을, 늦게야 알게 되는 때가 있다.
돌아보면 지난 계절의 나는 많은 것을 서두르며 살았다. 해야 할 일은 늘 앞에 쌓여 있었고, 아직 오지 않은 결과를 미리 걱정하느라 오늘의 빛을 놓친 날도 있었다. 더운 날씨가 사람을 지치게 하듯, 마음속의 조급함도 생각보다 많은 기운을 빼앗아 갔다. 그러면서도 어떤 날은 견뎌야 했고, 어떤 관계와 일은 쉽게 결론 낼 수 없었다. 그 시간들이 헛되었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그 시간을 지나며 감당한 일의 양보다 내가 어떤 사람이 되어 가는지가 더 오래 남는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제는 그 안에서 조금 더 깊어지고 싶다.
성숙은 모든 문제를 능숙하게 해결하는 모습이라기보다, 자기 안에 남은 뜨거움과 불안을 알아차리는 일에서 시작되는 듯하다. 말해야 할 때와 기다려야 할 때를 가르고, 지친 사람의 표정을 알아보며, 아직 익지 않은 것을 억지로 재촉하지 않는 마음 말이다. 나의 삶도 계절처럼 단숨에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지나온 더위를 제 안에서 무엇으로 바꾸어 낼지, 그 물음 앞에서 조금 더 정직해지고 싶다.
해가 기울 무렵 다시 창밖을 보면, 건물 사이의 하늘은 낮보다 한층 깊은 푸른빛을 띤다. 매미 소리는 아직 여름의 한복판에 머물러 있지만, 바람은 잠시 이마의 땀을 식혀 준다. 내일 입추를 맞는다는 사실은 그저 달력의 표시가 아니라, 뜨거운 날들 한가운데에도 다음 계절은 이미 오고 있다는 조용한 소식처럼 느껴진다. 오늘의 하늘 아래에서, 내 삶에도 그런 맑고 높은 변화가 천천히 시작되기를 바라본다.
